고려시대 죽산박씨 가문  (竹山 朴氏 家門 )  연구

 

홍 완 표*

Ⅰ. 머리말

Ⅱ. 고려 전기의 죽산 박씨

Ⅲ. 고려 후기의 죽산 박씨

Ⅳ. 맺음말



Ⅰ. 머리말


  貴族制社會였던 고려시대의 실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특정한 귀족가문에 대한 연구는 중요한 작업이었고, 현재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고려시대의 성씨와 본관에 관한 연구들도 적지 않게 이루어져 있어서 고려시대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 글에서는 竹山에 본관을 두고 있던 죽산 박씨 가계를 고찰하여, 죽산 박씨가 고려 시기에 어떤 위상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알아보려고 한다. 죽산 박씨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성과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李起男은 고려 忠宣王代 改革政治를 고찰하는 과정에서 당시 주요한 역할을 하였던 朴全之의 정치적 성격을 밝히는 과정에서 그의 가문으로서의 죽산 박씨에 대하여 언급하였고,1) 이수건은 고려시대의 土姓을 살피는 과정에서 고려전기와 후기의 土姓으로서의 죽산 박씨에 대하여 일부 밝힌 바가 있으며,2) 金光哲은 고려후기의 世族層에 대한 연구에서 죽산 박씨를 朴仁碩 가계와 朴全之 가계로 나누어서 간단하게 소개하면서, 박인석 가계는 전기 이래 家勢를 유지해 나간 것으로 보았지만, 박전지 가계는 충선왕대 이후 세족으로서의 기반을 갖추었다고 파악하였다.3) 류창규는 죽산 박씨 중 朴仁碩의 활동에 주목하였다.4)

  그러나 이런 연구들은 죽산 박씨를 주요 주제로 다룬 연구가 아니어서, 죽산 박씨 가문과 그들의 고려 사회에서의 위상과 역할 등에 대하여 충분히 밝혀지지는 않은 것 같다. 죽산 박씨는 고려 전기에 朴忠淑, 朴挺蕤 등, 고려 후기에 朴仁碩, 朴全之, 朴形 등 여러 고급관료들을 배출한 귀족가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죽산 박씨에 대한 가문 연구는 제대로 이루어져 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이번 죽산 박씨 가문연구는 고려 귀족가문의 다양한 모습을 밝히는데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Ⅱ. 고려 전기의 죽산 박씨


  고려 전기의 죽산 박씨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고찰하기 전에 먼저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평산 박씨와의 구별 문제이다. 㰡”고려사㰡• 권 95, 박인량(朴寅亮)전에 “박인량의 자는 대천이며 죽주인이고 혹은 평주인이라고도 한다(朴寅亮 字代天 竹州人 或云平州人)”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만을 놓고 본다면, 박인량이 활동하던 문종대와 숙종대까지는 죽산 박씨와 평산 박씨를 특별히 구별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한편 박인량의 선조인 朴守卿에 대해서는 㰡”고려사㰡•에서 평주인으로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박인량의 본관에 대하여 혼란이 있는 것에 대하여, 이수건은 光宗初까지 활약을 보이던 박수경이 광종 15년(964) 광종에 의하여 단행된 호족억압책으로 인하여 그의 3아들이 감옥에 들어가자 그 충격으로 죽었고,5) 그 뒤 가세가 기울어져 그의 손자대부터 평산에서 이탈하여 개경으로 가서 지내다가 다시 전 본관지인 죽산으로 옮긴 까닭에 박수경의 현손인 박인량은 다시 㰡”고려사㰡•에 죽산 또는 평산인이라고 기록되게 되었고, 㰡”新增東國輿地勝覽㰡•에서는 박수경을 平山都護府 인물조에6), 박인량과 그의 아들인 朴景仁, 朴景伯, 朴景山은 죽산현 인물조에7) 각각 기재되었다고 파악하였다.8)

  이러한 이수건의 견해는 일면 타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판단을 하여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 즉, 보다 일차적인 자료라고 할 수 있는 박경인과 박경산의 묘지명에서 그의 견해와는 달리 생각하게 하는 내용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박경인의 묘지명에는 그의 선조에 대하여, “其先北京都尉朴赤烏 自新羅入竹州爲察山侯 又入平州 置十谷城等 十三城 歸于弓裔王 厥後子孫蕃昌”이라고 기록되어 있고,9) 박경산의 묘지명에는 “朴氏之先鷄林人也 盖新羅始祖赫居世之裔也 新羅之季 其孫察山侯積古之子 直㣧大毛達徙居平州 管八心戶爲邑長  故自直㣧而下爲平州人”이라고 되어 있어서10) 박경인과 박경산의 묘지명을 작성한 시기에는 그들 후손들이 자신들의 본관을 평주[평산]로 인식하고 있음이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차 자료라고 할 수 있는 묘지명과 㰡”신증동국여지승람㰡•의 내용이 상충하고 있기 때문에 박경인과 박경산을 죽산 박씨로 볼 것인지, 아니면 평산 박씨로 볼 것인지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는 않다. 그러나 묘지명이 가장 우선하는 자료라고 볼 수 있고, 또한 그것은 그 후손들이 갖추어서 작성한 것이라고 생각되므로 이 글에서는 박경인과 박경산 가계는 평산 박씨로 간주하여, 다루지 않도록 하겠다. 또한 현재 죽산 박씨 가문에서 만들어진 족보들에서도 박경인 가계는 언급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취급하지 않는다.11)

  현재 전하고 있는 일차 자료인 묘지명들12)과 㰡”고려사㰡• 등에는 죽산 박씨의 자세한 세계가 전하지 않는다. 그것들 중에서 가장 자세한 내용을 전하고 있는 것은 박인석 묘지명이다. 그에 따르면, 박인석은 시조인 朴奇悟의 9세손이고, 曾祖는 永侯, 祖는 挺蕤, 父는 育和, 母는 司宰少卿 李稹의 딸이라고 되어 있다. 박인석은 㰡”고려사㰡•에 따로 立傳되어 있지 않은데, 祖인 박정유는 입전되어 있고, 거기에 그의 아버지 박영후에 대한 언급이 있지만, “박영후가 일찍이 충효의 도로써 경계하였고 박정유 또한 스스로 힘썼다”라는 내용뿐이다.13) 이에 어쩔 수 없이 위에서 언급한 족보들과 㰡”氏族源流㰡•14)를 이용하여 시조인 박기오부터 박인석까지의 세계를 아래에 나타냈다.

 <그림 1 : 고려 전기 죽산 박씨 세계도>

 

 朴奇悟 - 朴述 - 朴忠淑 - 朴溫裕 - 朴衡 - 朴永侯 -

                 

 朴永侯 㰠†㰠1자 朴挺㽔 - 朴育和 㰠㰠‡㰠 朴仁碩

        㰠                      㰠Œ㰠 女 = 洪元中

        㰠Œ㰠2자 朴挺奕 - 朴肇開 㰠㰠‡㰠 朴玄球

                               㰠Œ㰠 女 = 李公璘

 

이 세계도에 바탕하여 고려 전기에 있어서의 죽산 박씨의 정치적 활동에 대하여 살펴 보겠다. 먼저 시조인 박기오에 대하여는 박인석 묘지명에 三韓功臣 太保 三重大匡이라고 되어 있는 것과 박전지 묘지명에 三韓壁上功臣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 이외에는 다른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묘지명의 기록을 최대한 존중해 준다면, 박기오는 아마도 후삼국시대에 태조 왕건을 도와서 그 공로로 공신에 책봉된 듯하다. 그렇지만 그의 아들 박술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 박술은 별다른 관직을 갖지 못한 듯하다.15)

  그러다가 박충숙 대에 오면 활발한 관직 생활을 보이기 시작한다. 현종 1년(1010) 10월 거란이 2차로 침입을 하였을 때, 박충숙은 禮賓卿으로 中軍兵馬使에 임명받아서 行營都統使 康兆의 지휘를 받아 거란과 전투를 벌였다.16) 그때 세운 공로 때문인지 현종 2년 8월 西京副留守로 나갔다가, 다음해 2월에는 尙書左僕射에 올랐다. 그 뒤 한동안은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않다가, 현종 13년 2월에 叅知政事(종 2품)로 國子司業 李瓊과 함께 거란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이후 어느 때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門下侍郞平章事(정 2품)로 치사하였다가, 정종 3년(1037) 2월에 죽으니, 조정에서 貞愼이란 시호를 내려 주었다.17)

  박충숙 이후 다시 죽산 박씨 가문은 별다른 고위 관직자를 배출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박충숙의 아들 박온유와 손자 박형, 그리고 증손자 박영후에 이르기까지 기록상 관직을 지낸 근거는 찾을 수 없다. 다소 부침이 심하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되지만, 당시 3대에 걸친 기간 동안에 그 가문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런데 박형 때에 그의 집안이 죽산에 있던 모든 기반을 잃어 버리고, 龍山의 淸溪洞에서 가문을 다시 일으키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견해도 있다.18) 그 주장은 㰡”靑鶴集㰡•이라는 책에 근거한 것인데,19) 신빙성에 다소 의문이 간다. 그 책에서는 박형을 고려 仁宗 때의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박형의 손자인 朴挺蕤는 뒤에 서술하겠지만, 睿宗 때 과거에 합격하였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㰡”청학집㰡•에서 고려 인조 때 사람으로 묘사한 박형을 박정유의 조부와 동일인으로 파악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어떻게 인종 때 인물로 묘사된 박형의 손자인 박정유가 인종의 아버지인 예종 때 과거에 합격할 수가 있단 말인가.

  한동안 고위관직자들을 배출하지 못하였던 죽산 박씨 가문은 박영후의 아들 대에 들어와서 다시 번영의 기초를 다지기 시작한다. 박영후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동생인 朴挺奕에 대해서는 관직 등은 물론이고 여타의 기록도 찾을 수 없다. 그렇지만 형인 朴挺蕤는 㰡”고려사㰡• 열전에도 입전되어 있을만큼 활발한 관료 생활을 하였다. 박정유 계열과 박정혁 계열은 이후 별다른 연관성을 갖지 않고 활동하였고, 주로 활동한 시기도 다르다. 또한 현재 죽산 박씨 집안의 거의 모든 족보에서도 박정유와 박정혁 대에 최초로 분파가 이루어진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도 그들을 각각 박정유 계열과 박정혁 계열로 나누어 보겠다.

  박정혁 계열은 그의 증손자까지는 㰡”고려사㰡•와 같은 正史에는 관료 활동의 기록을 남기고 있지 않다. 따라서 여기서는 박정유 계열을 먼저 살펴 보겠다. 먼저 박정유는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睿宗 때에 과거에 합격하였다. 그 뒤 慶源郡判官을 지내고, 仁宗 초에 左正言(문하부 종 6품)이 되었다. 10년 8월에 정책 수행과 관련하여 왕에게 간언하다가20) 왕의 뜻을 거슬려 잠깐 仁州의 수령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仁州는 곧 慶源郡인데, 이렇게 다시 경원군의 수령으로 보낸 까닭이 있을 것도 같지만, 그에 따른 설명은 전하지 않는다. 그는 그곳에서의 업무 수행에 대한 평가가 최상위 등급을 얻어서 다시 중앙으로 발탁되어 殿中侍御史(정 6품)를 지냈다. 인종 13년 ‘妙淸의 亂’이 일어났었고, 그것은 金富軾이 총책임자가 된 토벌군에 진압되었다. 이때 토벌군에 참여하였던 인물 중 樞密使 陳淑 남의 노예와 뇌물 등을 받은 것이 드러나자, 박정유는 知御史臺事(종 4품) 崔灌과 侍御史(종 5품) 印儀와 崔述中․安淑 등과 더불어 그를 탄핵하기를 3일 동안이나 하였다. 그럼에도 왕이 그것을 조처하는 명령을 내리지 않자, 물러나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인종이 불러 달래어 일을 보게 하였는데도 박정유와 최술중은 굳이 일을 보러 나아가지 않았다. 그 때문에 안숙은 면직당하기까지 하였다. 그 뒤 박정유는 右副承宣(정 3품)으로 옮겼는데 進退가 단아하고 應對가 명민하였기 때문에 왕이 중히 여기는 바가 되어서 인종 22년에는 樞密院副使(정 3품) 兼 太子賓客(정 3품)이 되었다.21) 다음해에 죽으니 나이 57세였다.22) 조정에서 忠質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박정유가 이렇게 출세한 것에는 아버지인 박영후가 충효의 도를 가르친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을 것인데, 그에 대해서는 일체의 관련기록이 전하지 않는 것은 조금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23)

  박정유의 아들 박육화는 과거 급제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의종 11년(1157) 11월에 刑部員外郞(정6품)으로 金에 橫賜使로 파견되었음이 확인된다.24) 의종 17년에는 給事中(문하부 종4품)으로 재직 중에 東北面兵馬副使에 임명되었다.25) 그 뒤 출세의 과정이 기록으로 전하지는 않지만, 꾸준히 승진을 계속하여 명종 3년(1173) 윤 1월에는 守司空 左僕射(정 2품)에 올랐다.

  그런데 국왕의 잘못된 행동을 諫言해야 하는 諫官인 급사중으로 재직할 때의 두 가지 사건에서 박육화가 처신한 바를 보면, 그는 다분히 권력에 순응하는 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사건을 살펴 보면, 당시 국왕인 의종은 宮人 無比를 몹시 총애하여 그녀를 통하여 3남 9녀를 낳았는데, 崔光鈞이 무비의 사위가 되자 단계를 뛰어넘어 8품을 내려주고 式目錄事를 겸하게 하였다. 그러자 士大夫들이 모두 분노하여 이를 갈지 않는 이가 없었고, 諫官들은 최광균의 告身에 서명하지 않았다. 이에 왕이 16년 6월에 諫議 李知深․급사중 박육화․起居注 尹鱗瞻․司諫 金孝純․正言 梁純精․鄭端遇를 불러 서명하기를 독촉하니, 郞舍들이 두려워하고 위축하여 모두 예예하고 물러갔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26)

  17년 8월에는 左正言 文克謙이 宦者 白善淵과 궁인 무비, 그리고 術人 榮儀 등이 국왕의 총애를 업고 불법을 자행하고 있는 상황과 知樞密事 崔褎偁의 권력 남용을 지적하면서, 백선연․무비를 참하고 榮儀를 내쳐 牧子에 충당시키고 최유칭은 파직시킬 것을 상소하였다.  그 내용 중에 궁궐의 추문에 대하여도 언급하였기 때문에, 의종이 크게 노하여 그 상소를 불살랐다. 또한 최유칭이 궁궐에 나와 대질하기를 청하므로 왕이 문극겸을 불러 대질하게 하였는데, 문극겸의 말이 심히 간절하고 지극하였지만 드디어 黃州判官으로 좌천당하였다. 그런데 처음 문극겸이 위의 상소를 올리려고 할 때, 간의 李知深․급사중 박육화․起居注 윤인첨 등이 연서하기를 즐겨하지 않았고, 문극겸이 폄직된 후에도 또 태연자약하게 일을 보았다고 한다.27)

  이렇게 국왕과 권신의 잘못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나서서 비판하지 않았던 박육화는 다른 측면에서 보면, 국왕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의종 24년 武臣亂이 발생하고 武臣政權이 성립한 뒤, 많은 문신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난을 피하여 낙향하였는데, 박육화는 명종 3년에 오히려 수사공 좌복야라는 고위 관직을 제수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Ⅲ. 고려 후기의 죽산 박씨


1. 박정유 ( 朴挺蕤) 계열

  죽산 박씨 중 고려 후기의 인물로 제일 먼저 언급하여야 되는 인물은 박인석이다.28) 그는 박육화의 아들로서 8세에 春坊學友가 되었고, 문음으로 掌醴令同正이 되었다가, 成州29)의 수령이 되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업무를 잘 처리하여 치적의 평가가 1등을 받았기 때문에 八關寶判官 겸 右軍錄事에 임명되었다. 명종 즉위년(1170)에 금 나라에서 선왕인 의종을 폐위한 곡절을 살피려고 宣問使를 보냈다. 그때 박인석은 內侍로서 先排使에 임명되어 사신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사신의 행차가 西京에 이르러 의심을 하면서 개경으로 오지 않으려고 하였다

 

<그림 2 : 무신정권기의 朴挺蕤 계열 죽산박씨 세계도>30)   

     朴仁碩 㰠㰠㰠‡㰠 朴文成 - 朴晎         

              㰠Œ㰠 朴犀

     朴玄球 - 朴益旌 - 朴煇(朴暉)

                       朴暄

                       二女 = 奇洪碩

                       三女 = 金方慶

이에 그가 급하게 대궐로 나아가 밀지를 받들고 돌아와서 사신  들을 달래어 오게 하였다. 사신들이 돌아가자 그 공로로 都校署令(종 8품)에 임명되었다. 이로써 볼 때 박인석은 그의 아버지 박육화의 영향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무신정권에 비교적 적극적인 자세로 참여한 것 같다.

  다음해에는 궁궐이 불탔는데, 그는 국왕의 日錄 등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 잘 보존하였다고 한다. 그 뒤 詩司宰注簿(종 7품)에 오르는 등 무신정권의 성립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고 관직생활을 계속하던 그에게 위기가 닥쳤다. ‘金甫當의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그 사건이 박인석에게 직접적으로 미친 영향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그의 인척관계로 인하여 관료 생활에 위협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김보당은 靈光 金氏 출신으로 문반이었지만, 의종대 이래의 문란한 정치에 불만을 품고 무신정권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무신정권의 정치운영에도 불만을 품고, 자신이 東北面兵馬使가 되자, 의종의 복위를 주장하며 군대를 일으켰다가 3개월 만에 진압되었고, 그 결과 다시 많은 문신들이 학살되었다.31) 박인석은 김보당과 직접 관련은 없다. 다만 그의 장인인 金闡이 김보당의 친동생인 金至當의 처남인 崔寬의 장인이었는데,32) 김천은 무신난 직후 첫 번째 인사에서 樞密院副使에 임명되었고,33) 명종 2년에는 鄭仲夫 등과 함께 兵馬使에 임명되는34) 등 활발한 활동을 보였지만, ‘김보당의 반란’ 이후에는 관련 기록이 없다. 아마도 김지당과의 관계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박인석도 그 영향을 받지 않았나 생각되는 것이다.35)

  박인석은 그 이후 原州에 유배되어36) 御史를 지낸 權不華와37) 함께 교유하며 지냈다. 그러다가 떠도는 소문에 연루되어 위험에 빠질 뻔하였는데, 조정에서 그를 아끼는 사람이 힘을 써서 죽산으로 유배지를 옮겨 주는 것에 그쳐 큰 화는 면하게 된다.

  모두 24년 동안 관직을 떠나 있다가 명종 26년 50이 넘은 나이에 崔讜의 천거로 東萊縣令에 임명되어 다시 관직생활을 시작한 박인석은 이후 春坊通事舍人, 監察御史 등을 거쳐 刑部員外郞이 되었다. 이 시기에 경주에서 利備․孛佐가 주동이 난 민란이 일어나자 그는 그들을 달래기 위하여 파견되었지만,38)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아 토벌군이 조직되었을 때 中軍招討判官에 임명되어 공을 세워 전장에 있는 상태에서 殿中侍御史에 임명되었다39)가 곧바로 殿中丞으로 승진되었다. 그곳에 남은 반란군을 토벌하는 임무로 다시 按察使에 제수되었는데,40) 주동자인 金順을 체포하는 공을 세우자, 조정에서는 그의 아들 朴犀에게 內侍職을 수여하고, 그는 御史雜端으로 승진시켰다.

  그는 최씨 집권기에 금 나라와의 외교관계에서도 일정한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가문의 유지에 공헌하였다. 賀正使로 금 나라에 갔다 왔으며, 금의 夏節日使를 접대하는 임무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그 과정에서 벼슬은 大府少卿 겸 三司副使를 거쳐, 南京留守, 大府卿 겸 三司使를 거쳐 戶部尙書(정 3품)로서 퇴직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은 강종 1년(1212)년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박인석은 가문의 덕으로 강릉 김씨 출신으로 樞密院使 吏部尙書 翰林學士承旨를 지낸 金闡의 딸과 혼인하여 7남 3녀를 낳았는데, 막내아들인 박서를 제외하고는 모두 그 보다 먼저 죽었다. 외손 安孝德과 金軾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그의 집안이 명문 문반 집안들과 계속적으로 혼인관계를 유지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한편 최당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海東耆老會를 위한 글을 박인석이 지었다는 점은41) 해동기로회에 참여한 인물들이 최충헌 정권 초에 정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인물들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42) 어려운 시대를 헤쳐 나가기 위하여 박인석이 적극적인 노력을 전개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43)

  박인석의 막내아들 박서는 고종 18년(1231) 몽골의 1차 침입 때의 龜州城 전투에서 朔州分道將軍 金仲溫과 靜州分道將軍 金慶孫과 함께 사력을 다하여 撒禮塔이 이끄는 몽고군을 물리친 것으로 유명하다. 그때의 전투에 참여한 몽고군의 장수 중 나이 거의 70세나 되는 자가 “내가 종군하여 천하의 城池 攻戰하는 상황을 두루 보았으나 일찍이 공격을 당함이 이와 같은데도 마침내 항복하지 아니한 자는 보지 못하였으니 성 안의 여러 장수들은 他日에 반드시 다 將相이 될 것이다.”라고 감탄하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국가를 위하여 죽을 힘을 다하였지만, 몽고와 강화를 맺는 과정에서 몽고의 사신이 박서가 항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죽이려고 하자, 執政 崔怡는 박서에게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권유였을 것이고, 결국 박서는 향리로 돌아갔다고 한다. 㰡”고려사㰡• 박서전에는 몽고 1차 침입 이후 門下平章事(정 2품)에 임명된 적이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향리로 물러나기 전이 아닌가 생각된다.44)

  이렇게 뛰어난 공로에도 불구하고 불운하게 관직에서 물러났기 때문인지 박서에 대한 㰡”고려사㰡• 등의 기록은 적은 편이다. 즉, 몽고군과의 전투와 관련된 부분을 제외한 다른 기록은 없다. 그는 앞에서 보았던 것처럼 아버지인 박인석이 경주에서 일어난 민란을 토벌하는데 세운 공로로 희종 즉위년 무렵 내시가 되었고,45) 고종 18년 西北面兵馬使(3품)로서 귀주성을 방어하고 있던 것으로 보아 비교적 순조로운 관직생활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이 약 27년여 동안의 관직에 대해서는 확인이 되지 않는 것은 특이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점 보다 더 주목되는 것은 박서가 관직에서 타의로 물러난 이후 그의 후손들도 원 간섭기 동안에는 㰡”고려사㰡•․㰡”고려사절요㰡• 등의 기록에서는 관료로서 활동한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현재 전하고 있는 족보들만을 놓고 본다면, 박서의 후손들은 뒤에 본관을 固城[鐵城]으로 한 파46)와 陰城으로 한 파47)로 갈라졌다. 이렇게 박서의 후손들에 대하여 기록을 전하는 것들 중에서 㰡”氏族源流㰡•의 고성 박씨와 음성 박씨 항목48)과 㰡”固城朴氏世譜㰡•, 㰡”陰城朴氏世譜㰡•, 그리고 㰡”竹山朴 氏忠質公派譜㰡•49) 등을 참고하여 박서 후손에 대한 세계도를 만든 것이 <그림 3>이다.

  그런데 위에서 참고한 자료들 사이에는 같은 사람의 이름이 다른 경우도 있고, 아예 세계의 흐름이 다른 것도 있어서 자료의 신빙성을 확보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현재 가장 믿을만하다고 생각되는 㰡”氏族源流㰡•에서는 고성 박씨의 시조를 朴彬으로, 음성 박씨의 시조를 朴玄桂로 기록하고 있고, 그들의 선대는 나타내고 있지 않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고 위의 그림에서 나오는 인물들 중 㰡”고려사㰡•와 㰡”고려사절요㰡•에 이름이 실려 있는 인물들을 추적해 본 결과, 朴淳, 朴普老, 朴修敬, 安祐 등 모두 4명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중 박순은 우왕 14년 5월에 都評議使司知印의 직책을 띠고 있는 기록이 단 한 번 보이는데,50) 촌수 관계를 고려하면 동명이인으로 생각된다.

 

< 그림 3 : 박서 후손 세계도 > 
 

 朴犀 㰠㰠㰠‡㰠朴寀(榟) - 朴玄桂 - 朴文吉(文瑞) - 朴淳(濟)

        㰠‰㰠朴謇

        㰠‰㰠朴寬

        㰠Œ㰠朴實 ----- 朴自安 - 朴彬  㰠㰠㰠㰠㰠㰠‡㰠朴奕連 㰠㰠㰠㰠‡㰠 朴璡

                                          㰠           㰠Œ㰠 朴玢

                                          㰠Œ㰠朴奕忠 㰠㰠㰠㰠‡㰠 朴普老

                                                      㰠‰㰠 朴元武

                                                      㰠‰㰠 朴修敬

                                                      㰠‰㰠 朴普生

                                                      㰠Œ㰠 女 = 安祐

朴普老는 우왕 1년 8월 密直副使(종 2품)로서 西海道副元帥 兼 都體察使에 임명되는 기록이 최초의 것이며,51) 이후 왜구 토벌에 많은 공을 세웠지만, 우왕 6년 2월 門下評理(종 2품)로 사망하였다.52) 朴修敬은 공민왕 12년 11월에 己亥擊走紅賊功臣 2등에 책록된 것이 최초의 기록이며,53) 역시 왜구와의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웠지만, 창왕 1년 9월 왜적과 싸워 패사하였다.54) 安祐는 공민왕 대의 유명한 무장으로서 紅巾賊의 격퇴에 큰 공을 세웠지만, 공민왕 11년 2월 김용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다.55) 이들 중 박수경과 안우가 박혁충과 관련되었다는 것은 㰡”氏族源流㰡•에만 나오는 내용이지만, 박보로와의 활동 시기 등을 고려한다면 맞는 내용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㰡”고려사㰡•와 㰡”太祖實錄㰡• 등에서는 그들의 관계를 확인할 방법이 없고, 특히 박혁충과 박서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정사에서 확인한 길은 없다는 점은 미진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김광철도 박보로를 죽산 박씨로 분류하였지만, 정확하게 어떤 자료를 참고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56)

한편 㰡”氏族源流㰡•에서는 朴彬이 명문 귀족가문인 경주 金台瑞의 손자인 金琿의 딸과 혼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같은 책 경주 김씨편에도 김혼의 장녀와 박빈의 혼인관계를 기록하고 있지만,57) 이것 역시 㰡”고려사㰡• 등에서는 확인이 되지 않는다.


2.  박정혁 (朴挺奕 ) 계열

  박정혁 계열은 아들인 朴肇開와 손자인 朴玄球까지는 족보 이외에서는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러다가 박정혁의 증손자인 朴益旌부터는 관직을 지낸 것이 확인된다. 박익정의 사위인 김방경의 묘지명에서 박익정의 이름이 확인되는데, 그는 起居郞(종 5품) 知制誥를 역임하였다고 한다.58) 김방경은 원 간섭기에 막강한 권세를 누렸던 인물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인데,59) 선후가 어찌 되었건 박익정의 집안은 뒷날 사위인 김방경의 덕을 보았을 것이다.

박익정의 아들 朴煇(暉)60)는 충렬왕 즉위년(1274)에 원이 일본을 공격할 때, 大府卿으로서 거기에 참여하였는데, 이때 그의 누이의 남편인 김방경이 일본 정벌에서 중요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김방경의 추천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후 별다른 기록을 보이지 않았지만, 典法判書(정 3품)까지 올랐다.

 

<그림  4 : 元 간섭기 朴挺奕 계열 죽산 박씨 세계도>61)

朴肇開 㰠㰠‡㰠朴玄球 ------ 朴益旌 㰠㰠㰠‡㰠 朴煇(暉)  㰠㰠㰠㰠㰠㰠㰠‡㰠 朴全之

        㰠Œ㰠女 = 李公璘            㰠‰㰠 朴暄            㰠‰㰠 朴宜之

                                 㰠‰㰠 女 = 奇洪碩     㰠‰㰠 女 = 奇琯

        洪子藩 孫女              㰠Œ㰠 女 = 金方慶     㰠Œ㰠 女 = 王烈

           ∥㰠㰠㰠㰠㰠㰠㰠㰠㰠㰠㰠㰠㰠ˆ

朴全之   㰠†㰠 朴遠         㰠‰㰠 朴仁龍

  ∥     㰠               㰠‰㰠 朴文珤

  ∥㰠㰠㰠㰠㰠㰠Š㰠 女 = 鄭倬    㰠‰㰠 朴德龍

  ∥     㰠               㰠‰㰠 朴壽龍

  ∥     㰠Œ㰠 女 = 李稷    㰠‰㰠 朴天龍

  ∥                     㰠‰㰠 朴文柱(門壽)

 崔恬 女                 㰠‰㰠 女 = 王璉

(崔冲 10세)              㰠‰㰠 女 = 許齡

                         㰠Œ㰠 女 = 尹珍

  박정혁 계열의 위치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 것은 朴全之에 의해서이다. 박전지가 크게 두각을 드러낸 것은 忠宣王이 즉위하여 ‘개혁정치’를 시작하면서부터이다.62)


세자가 왕위를 물려받자 詞林院을 두고, 朴全之․崔圓․吳漢卿․李瑱으로 學士를 삼아 銓注를 맡게 하였다. 박전지 등에게 명령하여 즉위 교서를 짓게 하고, 綾絹․紬․苧布 각 15필과 尙乘의 鞍馬를 하사하였으며, 뒤에 또 박전지․오한경․이진․權永에게 紅鞓을 하사하였다. 왕이 항상 좌우를 물리치고 사림원에 행차하여, 박전지 등과 더불어 政事를 謀議하고 손수 술과 음식을 하사한 후에 조용히 하루 종일 지내다가 혹 밤에 이르면 宮燭을 주어 보내어 그 집에 이르게 하니, 총애함이 비할 바가 없었다(㰡”고려사㰡• 권 109, 朴全之傳).


  충선왕은 왕위에 오르자, 政房을 폐지하고, 文翰署에서 인사를 담당하게 하였다가 곧 문한서를 사림원으로 고치고, 朴全之․崔圓․吳漢卿․李瑱 등 4명을 사림원학사로 임명하여, 인사는 물론 왕명 출납의 업무까지 담당하게 하였다. 이후 충선왕대 정치는 사림원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는데, 그 핵심에 박전지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박전지가 충선왕 즉위와 함께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원 간섭기 최고의 실세 중 한 명인 김방경이 박익정의 사위 곧, 박전지의 고모부였다. 또한 나아가 무신정권 말기부터 최고의 지위를 유지하여 온 李藏用은 그의 외조부였다.63) 이런 가문적 배경64) 위에 그의 학문적 능력이 뒷받침되었던 것이다. 그의 재능을 외조부인 이장용은 일찍부터 발견하고 아들처럼 양육하였는데, 그 덕분인지 박전지의 학문에 대해서는 “及長博通三墳百家 兼貫陰陽秘訣 至於□□方藥之書 無不精核 善屬文 而樂章最尤”라고 평가하였다고 한다. 이런 집안의 뒷받침과 자신의 자질에 힘입어 박전지는 18세인 원종 8년(1267) 國子監試에 합격하고, 다음해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65) 바로 內侍가 되었다. 이어 여러 관직을 거쳤는데, 모두 한림원을 겸하였다.

  박전지가 한 단계 더 뛰어오를 수 있는 사건이 忠烈王 5년(1279)에 일어났다. 당시 元 世祖가 조를 내려서 衣冠子弟를 뽑아 入侍하게 하였을 때, 거기에 참여하여 원에 가서 원의 이름난 선비들과 사귀어 학문으로 이름을 떨침으로써 고려뿐만 아니라 원에까지 자신의 존재를 널리 알릴 수 있었던 것이다. 충렬왕 12년에 원 조정에서 征東行中書省照磨 겸 儒學敎授 同提擧를 임명받아 고려로 돌아왔다. 이때 충렬왕이 중하게 여겨 이부와 병부의 侍郞에 임명하였지만, 나이가 적은데 벼슬이 너무 높다고 글을 올려 사양하고, 충렬왕 15년 외직인 安東府使를 맡아 나갔다. 그렇지만, 곧 충렬왕이 불러서 殿中尹 知製敎에 임명하였다. 즉, 그는 이미 원종 때부터 자질이 검증된 인물이었고, 나아가 그는 김방경의 조카이고, 이장용의 손자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충선왕과도 이미 왕이 세자일 때부터 관계를 맺고 있었다. 즉 충선왕이 세자가 되었을 때 박전지는 侍講學士에 임명되었고, 충선왕이 세자로서 원에 숙위하러 갈 때에는 시종 신료로서 따라가 충선왕이 왕이 되기 전까지 가까이에서 보필하였기 때문에 자연히 충선왕이 박전지를 믿고 기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가문적 배경, 개인적 능력, 그리고 충선왕과의 밀접한 관계가 삼위일체가 되어 박전지는 충선왕이 ‘개혁정치’를 실시할 때 제일 선봉에 설 수 있었고, 충선왕 재위 중에 그의 권위는 “凡沿革官號大爵與奪 皆出公之一手”라고 할 정도였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충렬왕이 다시 복위하자 그는 제일 먼저 관직에서 쫓겨나기도 하였지만, 충선왕이 다시 복위한 뒤에는 또다시 승승장구하였다. 忠肅王이 즉위한 뒤에는 나이가 들어 원로로서 대접받다가, 충숙왕 4년 9월 考試官으로서 同考試官 摠部典書 白元恒과 함께 과거를 주관하여 洪義孫, 鄭䫨, 金光輅. 許伯 등을 뽑았다.66) 충숙왕 6년(1319) 推誠贊化功臣 藝文館大提 檢校僉議政丞 監春秋館事 延興君이 되었고, 다시 왕 12년 三重大匡 守僉議政丞(종 1품) 右文館大提學 監春秋館事 上護軍을 더하여 치사하게 하였는데,67) 연흥군과 공신호는 전과 같이 유지하였다. 박전지는 그해 7월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나이만큼이나 그가 죽산 박씨 가문의 발전에 끼친 영향력은 대단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정확한 시기가 확인되는 것은 아니지만 박전지의 인물됨과 앞을 내다보는 능력을 알 수 있는 두 가지 사건이 있다. 하나는 어느날 충선왕이 불러 궐내에 들어갔을 때 廣平君과 江陵君이 왕을 모시고 있었는데, 각각 이름을 쓰게 하여 박전지에게 보이고 말하기를, “누가 나라를 맡을 자인가?” 하고 물어보니, 박전지가 감히 대답하지 못하였는데, 왕이 굳이 요구하므로 한참 뒤에 자리를 피하여 아뢰기를, “兩君의 필적을 살펴보니 둘째 왕자(江陵君)께서 當璧하겠습니다.” 하였다. 그런데 두어 달이 지나지 않아서 廣平君이 돌아가시고, 江陵君이 다음 왕(충숙왕)이 된 것이다.68) 또 하나는 충숙왕 10년 왕이 원의 수도인 燕京에 있을 때, 瀋王派가 立省 책동을 벌이면서 왕을 무고하는 글을 원의 중서성에 올리려고 할 때, 박전지에게도 서명할 것을 협박하였는데, 박전지는 “개 같은 놈들이 감히 나를 더럽히려고 하느냐.” 하면서, 오히려 아들인 朴遠을 왕의 처소에 보내어 그 일을 알린 일이 있었다.69) 두 사건은 모두 그의 시세 판단 능력을 보여주는 것인데, 한편으로는 모두 충숙왕에게 신임을 받을 수 있는 행동이었고, 그 덕분에 충숙왕대에 박전지 자신은 물론이고 그의 아들인 박원까지도 신임을 받을 수 있었다.

  한편 박휘의 사위로는 奇琯과 王烈이 확인되는데, 왕렬은 기록을 찾을 수가 없으며, 기관은 忠烈王 13년(1287) 11월에 大將軍으로서 원나라에 신년 축하사신으로 간 기록이 나오는데, 동일인물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70)

  박전지는 76세까지 장수를 누리고 죽었지만, 崔冲의 9세손이며 衛尉卿 東宮侍讀學士를 지낸 崔恬의 딸과 사이에서 1남과 2녀만을 두었다.71) 박전지의 사위로는 鄭倬과 李稷가 묘지명에서 확인되는데, 정탁은 충렬왕대의 명망있는 관료이고 僉議中贊(종 1품)까지 올랐으며, 충선왕묘에 배향된 鄭可臣의 아들이고,72) 이직은 讞部典書(정 3품)를 지낸 李行儉의 아들로 과거에 급제하여 成均大司成에까지 올랐다. 이직의 조카딸이 奇子敖에게 시집가서 낳은 딸이 뒤에 원 순제의 황후가 된 奇皇后이다.73) 이러한 혼인관계를 통해서 볼 때도 이 시기의 죽산 박씨의 사회적 지위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박전지의 유일한 아들인 朴遠도 집안의 성세를 이어나가는데 충분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초명은 瑗이었는데, 그 뒤 박전지가 죽은 뒤 이름을 遠으로 고쳤다.74) 그는 처음 門蔭으로 관도에 들어선 것 같으며, 이후 정확한 시기는 확인할 수 없지만, 과거에 합격하였고,75) 충숙왕 13년에는 權準과 함께 과거를 주관하여, 崔元遇, 李仁復, 鄭誧, 李達衷 등 후일의 인재들을 선발하였다.76) 이런 사실로 볼 때 그의 학문적 재능도 뛰어났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의 학문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확인할 수 없다. 한편 앞에서 언급하였던 것처럼 불과 9년 전에 그의 아버지 박전지도 과거를 주관하였는데, 이렇게 10년도 되지 않는 사이에 부자가 과거를 주관하였다는 것은 충숙왕이 박전지와 박원에 대한 믿음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일이며, 아울러 죽산 박씨 가문의 대단한 영광이었을 것이다.

  박원의 관직 생활에는 아버지인 박전지의 영향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충숙왕 11년 右副代言(정 3품)에 임명된 것도 앞서 박전지와 함께 瀋王派의 책동을 막아내는데 노력한 공 때문이며,77) 충숙왕 14년 推忠翊戴 2등공신에 책록된 것도 그 공으로 인한 것이었다.78) 그는 古阜郡事, 司僕寺丞, 權征東行省左右司郎中, 軍簿判書(정 3품) 등을 거쳐 政堂文學(종 2품)까지 지냈다.79) 그의 아버지인 박전지가 충선왕의 총애를 받은 반면, 그는 충숙왕의 총애를 받아서 순탄한 관직생활을 영위해 나갔다고 할 수 있다.

  박원은 贊成事(정 2품)를 지낸 洪敬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홍경의 아버지는 무인집권기부터 고위관직을 역임하여 僉議中贊(종 1품)을 15년 동안 지낸 洪子藩이다. 이런 박원의 혼인을 통해서도 당시 죽산 박씨의 가세를 확인할 수 있겠다. 홍씨 부인은 5남 2녀를 낳고 죽었는데, 이로부터 집안이 더욱 번창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부인의 묘지명을 지어준 것이 당대의 최고문장가 중 한 명인 崔瀣라는 것에서 폭넓었던 죽산 박씨 가문의 교류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박원에게는 두 번째 부인이 있었는데, 鐵原府使를 지낸 柳湜의 딸인 文化 柳氏다. 족보 등을 통해서 볼 때, 그 사이에서 아들 1명과 딸 1명을 낳은 것으로 보인다.80) 박원의 아들 6명 이후에 대한 세계도를 따로 <그림 5>와 같이 작성하였다.

  박원까지는 주로 생활한 시대가 원 간섭기이지만, 박원의 아들 세대들은 원 간섭기부터 활동을 시작하여 공민왕 5년 ‘反元改革政治’ 이후 원의 간섭을 극복한 뒤에도 계속 활동하였다고 생각되고, 또한 원 간섭기에 3대를 계속하여 3품 이상 관직에 오르는 등 명실상부한 귀족 가문이 된

 

<그림  5 : 恭愍王 이후 朴挺奕 계열 죽산 박씨 세계도>81)

 朴仁龍 -  朴禧                     朴德龍 㰠㰠‡㰠朴形 ----------- 朴仲容

           女 = 李元林                      㰠‰㰠朴雍 㰠㰠㰠㰠㰠㰠㰠㰠㰠㰠‡㰠 朴日昇

           女 = 金台權                      㰠               㰠‰㰠 女 = 楊天祿

           女 = 薛孝生                      㰠               㰠Œ㰠 女 = 權壎 

                                           㰠‰㰠朴純 㰠㰠㰠㰠㰠㰠㰠㰠㰠㰠‡㰠 朴仲宣

 朴文珤 㰠㰠‡㰠朴永忠 㰠㰠‡㰠朴翊                   㰠‰㰠女= 禹玄寶    㰠‰㰠 朴仲游

         㰠         㰠‰㰠朴翶                   㰠‰㰠女= 石抹時用  㰠‰㰠 朴仲實

         㰠         㰠‰㰠朴華                   㰠‰㰠女= 柳源      㰠‰㰠 朴仲遇

         㰠         㰠‰㰠女= 河澄               㰠‰㰠女= 柳濆      㰠‰㰠 女= 禹希烈

         㰠         㰠‰㰠女= 尹思修             㰠Œ㰠女= 郭居仁    㰠‰㰠 女= 洪彦

         㰠         㰠‰㰠女= 柳昶                               㰠Œ㰠 女= 朴詳

         㰠         㰠Œ㰠女= 閔植        朴壽龍

         㰠                         

         㰠Œ㰠 朴頤 㰠㰠‡㰠 朴云愼          朴天龍 -  朴季以 ------ 朴承秀

                  㰠‰㰠 女= 權緖        

                  㰠Œ㰠 女= 李俶捧      朴文柱(門壽) 㰠㰠‡㰠朴䕺 㰠㰠㰠  朴子良

                                                   㰠Œ㰠朴苞

죽산 박씨가 원의 간섭을 벗어난 뒤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시기를 구분하여 따로 살펴 보았다.

  장자인 朴仁龍은 어머니 홍씨 부인이 49세로 세상을 떠난 충숙왕 복위 5년(1336) 이전에 젊은 나이로 이미 세상을 떠났다.82) 그런 이유 때문인지 그의 아들 朴禧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박인룡의 사위로 기록된  李元林, 金台權, 薛孝生 중 설효생은 㰡”고려사㰡• 등에서 확인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원림은 金齊顔 등이 辛旽을 제거하려는 계획에 참여하였다가, 신돈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다는 기록이 있고,83) 김태권은 金鏞이 ‘興王寺의 亂’을 일으켰을 때 김용에 당부하여 공민왕을 죽이려고 한 인물들 중 하나였다.84) 두 사람 모두 㰡”고려사㰡•에서 단 한 건의 기록에만 나타나므로 별다른 내용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이원림이 참여하였던 신돈 제거 모의의 주동인물들이 주로 世族들이었다고 밝혀져 있고, ‘흥왕사의 난’에 참여한 인물들은 원나라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던 인물들로서 역시 世族的 기반이 강하였다고 생각되므로 박인룡의 사위들은 대체로 당대의 세족 출신이었다는 것 정도는 확인할 수가 있다고 보인다.

  2자인 朴文珤는 장자인 박인룡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여러 면에서 그의 몫을 대신하였다. 어머니인 홍씨가 죽었을 때에 아버지의 門生인 鄭誧에게 홍씨의 行狀 작성을 부탁하는 등 집안의 대소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다. 그런 측면 때문인지 본인 스스로는 출세를 하지 못한 듯 㰡”고려사㰡• 등에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있다. 그의 아들인 朴永忠은 주로 禑王代에 활동하였는데, 학문적 능력 보다는 군사적 능력으로 출세한 것 같다. 우왕 6년에 右常侍(정 3품)로서 公州道兵馬使에 임명된 적이 있고,85) 우왕 14년 요동 정벌군이 편성되었을 때는 助戰元帥로서 右軍都統使인 李成桂의 휘하에 편성되어 출정하였다가,86) 이성계를 따라 회군하였고, 그 공로로 공양왕 2년(1390) 4월에 回軍功臣 책봉 때 거기에 포함되었다.87) 그렇게 이성계와 위험을 함께 한 덕택으로 박영충은 조선 건국 뒤에도 태조 이성계의 寵臣으로 계속 활약하였고, 그의 아들 朴翶가 조선 세종 때 현의 수령을 능욕하는 등의 죄를 지었을 때 박영충이 태조 원종공신이므로 용서하여 준다는 기록도88) 있을만큼 조선 태조대까지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박문보의 2자 朴頤에 대해서는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박원의 3자인 朴德龍에 대해서는 㰡”고려사㰡•에 단 한 건의 기록만 보인다. 공민왕 3년(1354) 7월 “監察大夫로 삼았는데, 朴賽顔不花의 형이다.”라는 기사가 그것이다.89) 그런데 이 기사에 보이는 박덕룡이 박원의 아들이라면, 박새안불화가 누구인지 궁금하다. 그는 바로 전 달에 원에서 보낸 사신으로 나오며,90) 그때 관직은 工部寺丞이었는데, 한 달이 지나지 않아 고려에서 贊成事로 임명되었다.91) 그런데 죽산 박씨 족보 등과 㰡”氏族源流㰡•, 그리고 㰡”太祖實錄㰡• 등에서도 박덕룡의 동생으로 박새안불화라는 인물은 찾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위 기사에 보이는 박덕룡이 박원의 아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지만, 만약 맞다면 죽산 박씨 집안은 박원을 전후한 시기에 원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한편 박덕룡의 아들 朴形의 졸기에는 그가 典理判書(정 3품) 박덕룡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다.92) 그것을 통해서 볼 때 박덕룡은 전리판서까지 오른 것은 확실하다. 다만 과거 합격 여부는 확인할 수 없는데, 박형과 박형의 아들 朴仲容은 모두 과거에 합격하였다.93) 만약 박덕룡이 과거에 합격하였다면, 박전지부터 5대가 계속 과거에 합격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박형은 忠穆王 3년(1347) 4월 鄭思度가 주관한 成均館試에 장원하였으며, 그 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과거에 합격하였다. 우왕 원년(1375) 鄭夢周․鄭道傳 등 新進士大夫들이 李仁任 등이 주도하는 외교정책에 반발하여 정치적으로 도전할 때, 그 일원이었다. 즉, 그는 신진사대부들이 추구하는 개혁 노선을 지지하였던 것인데, 그 사건 이후 유배당하였다.94) 관직에 복귀한 시기는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우왕 6년 5월에는 원년에 같이 유배당하였던 廉興邦이 知貢擧, 박형은 密直使로 同知貢擧가 되어 李文和 등을 선발하는 영예를 누리는 것으로 보아95) 비교적 이른 시기에 관직에 복귀한 것으로 생각되며, 그것은 염흥방과 마찬가지로 가문의 덕에 힘입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후 박형은 개혁보다는 현실정치에 뜻을 두어서, 判開城府事, 贊成事(정 2품)를 역임하였다. 그런 정치 행보 때문인지 우왕 14년 1월 林堅味․염흥방 등이 우왕과 崔瑩 등에게 숙청당하였을 때, 당시 密直提學(정 3품)으로 재직 중이던 박형의 아들 朴仲容은 죽임을 당하였고, 박형 본인은 곤장 100대를 맞고, 유배당하여 수자리를 살았다.96) 그러나 조선 건국 이후 다시 관직에 복귀하여 藝文春秋館 太學士로 치사하였고, 태조 7년(1398) 1월 죽은 뒤에는 靖康이라는 시호도 받았다.97)

  박덕룡은 박형 이외에 족보에는 2자인 朴雍과 3자인 朴純, 그리고 5명의 딸을 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런데, 박옹과 박순에 대해서는 㰡”고려사㰡• 등에서는 관련 기록을 찾을 수가 없어서 자세한 것을 알 수 없다. 첫째 사위는 禹玄寶로 나오는데, 㰡”氏族源流㰡• 丹陽 禹氏편에서도 혼인관계를 기록하고 있다.98) 우현보는 공민왕 4년 과거 급제한 이후 우왕, 恭讓王代를 거쳐 조선 건국 이후까지 활약한 다른 설명이 필요없는 거물급 정치가이다. 둘째 사위는 石抹時用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공민왕 2년(1353) 2월 원에서 왕에게 옷과 술을 하사할 때 그것을 가져온 사신으로 그때 관직은 前 征東省 照磨였다.99) 그런데 다음해 4월에는 典理判書로, 6월에는 開城尹으로, 11월에는 密直副使로 임명되고 있다.100) 혼인이 그 무렵에 이루어진 것인지 아닌지의 여부도 확인할 방법은 없다. 셋째 사위인 柳源은 監察持平101) 등 공민왕대에 주로 司憲府 관직을 갖고 있었고,102) 密直司使를 거쳐,103) 昌王 원년(1389) 9월에 判開城府事로 知貢擧가 되어 同知貢擧 李種學과 함께 金汝知 등을 선발하였고,104) 공양왕 4년(1392) 4월 죽었다.105) 넷째 사위인 柳濆과 다섯째 사위인 郭居仁에 대한 기록은 확인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확인되는 3명의 사위만으로도 박덕룡이 얼마나 폭넓게 혼인관계를 맺었는지를 알기에는 부족함이 없다고 할 수 있겠다.

  한편 박원의 4자 朴壽龍과 5자 朴天龍, 그리고 6자 朴文柱(門壽)106)에 대한 기록은 㰡”고려사㰡• 등에서는 확인이 되지 않는다.

  박원에게는 홍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두 딸과 유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한 딸이 있었던 것 같다. 홍씨 부인 소생딸 중 첫째는 王璉과 혼인하였는데, 그는 神宗의 5대손으로 益興君에 봉하여졌다는 기록107) 외에는 다른 기록은 없다. 둘째 딸은 許齡과 혼인하였는데, 그는 忠穆王 즉위년(1344) 書筵을 열고, 侍讀하는 신하들을 정할 때 司藝로서 거기에 포함되었다.108) 한편 「홍씨 묘지명」에는 그가 士族이며, 홍씨 부인이 죽을 때의 벼슬은 散員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있다. 셋째 사위인 尹珍은 海平 尹氏인데,109) 우왕 8년(1382) 5월에 判厚德府事로서 同知貢擧가 되어, 知貢擧 順興君 安宗源과 함께 柳亮 등을 선발하였고,110) 12년 8월에는 贊成事(정 2품)로 密直副使 李希蕃과 함께 明에 歲貢을 감면해준 것을 감사하는 사신으로 갔으며,111) 14년 정월 林堅味․廉興邦 등을 숙청한 뒤 단행한 인사에서 門下贊成事에 임명되었다.112) 박원의 사위 3명을 살펴 보면, 역시 왕실과 귀족 가문들과 혼인관계를 맺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상에서 보듯이 박전지 계열은 원 간섭기를 벗어난 이후에도 귀족 가문으로서의 지위를 굳건히 지켜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Ⅳ. 맺음말


  죽산 박씨는 태조 때의 三韓功臣이었던 朴奇悟가 시조이다. 그의 아들인 朴述은 㰡”고려사㰡•에 기록이 없지만, 손자인 朴忠淑은 叅知政事를 거쳐 門下侍郞平章事로 치사하였다. 그러나 박충숙의 아들인 朴溫裕와 손자인 朴衡, 그리고 증손인 朴永侯에 이르기까지 뚜렷한 기록이 없다. 그러다가 박영후의 아들 대에 다시 가문이 번영하기 시작하였다. 박영후는 朴挺蕤과 朴挺奕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 중 박정유가 출세하였다. 그는 과거에 급제하였고 순탄한 벼슬길을 거쳐 樞密院副使까지 지냈다. 그의 아들 朴育和는 급제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역시 고위관직인 守司空 左僕射까지 올랐다. 그런데 박육화는 武臣亂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오히려 더 승진하였다는 점에서 죽산 박씨 가문이 무신들과 사이가 원만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고려 후기의 죽산 박씨는 박정유 계열과 박정혁 계열로 구분해서 살펴 보았다. 그 중 박정유 계열은 전기의 박육화에 이어 그의 아들인 朴仁碩도 戶部尙書까지 올라, 귀족 가문의 지위를 굳혔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박인석은 오랜 기간 동안 관직에서 떠나 있다가 崔忠獻 집권 말년에 50이 넘은 나이로 조정에 복귀한 뒤 최충헌 정권 하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그런 영향 아래 그의 아들인 朴犀는 몽고와의 전쟁에서 큰 공로를 세우고 門下侍郞平章事까지 올랐지만, 몽고의 압력으로 벼슬을 잃었다. 그 뒤 元 간섭기 동안 박정유 계열은 쇠퇴하였다가 공민왕대 이후 朴普老가 武將으로 활약하면서 門下評理까지 올라, 가문을 부흥시키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한편 박정혁 계열은 박정유 계열과 달리 원 간섭기에 가문이 번창하였다. 박정혁의 4대손인 朴暉는 典法判書에 올라 기초를 닦았다면, 그의 아들인 朴全之는 20세 이전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忠宣王의 총애를 얻어서 ‘改革政治’의 주역으로 활약하였으며, 延興君에 봉군되고 守僉議贊成事까지 올라 가문을 반석의 지위에 올렸다고 할 수 있다. 그 뒤 박전지의 아들 朴遠은 이러한 가문의 배경에 힘입어 洪子藩의 손녀와 혼인하는 등 당대의 귀족 가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였고, 스스로는 政堂文學까지 지냈다. 그의 아들들과 손자들 대부분은 고려 공민왕대 이후 조정에서 중요 관직을 지내는 등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귀족 가문의 지위를 누렸다.

  죽산 박씨 가문은 고려 초기에는 그다지 활발한 활동을 보이지 못하였지만, 仁宗代 이후에는 귀족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그 뒤 비록 계열을 달리 하였지만, 고려 멸망 때까지 집안의 성세를 이어갔다. 그 과정에서 武臣政權에 대한 협조, 元과의 적극적인 관계 유지 노력, 다른 귀족가문과의 적극적인 혼인관계 등을 통하여 가문의 유지를 위하여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A Study of Chuk San Park Family

in Koryô Dynasty



Hong Wan-Pyo


  This article examines Chuk San Pak(竹山 朴氏) family who had steadily produced the government officials in order to understand the nature of Koryô Dynasty that was a aristocratic society. For a systematic analysis it classifies Koryo Dynasty with two times as the First Half of Koryô Dynasty and the Latter Half of Koryô Dynasty. And in the case of Chuk San Pak of the Latter Half of Koryô Dynasty, it clasifies two branch of family again.

  The founder of Chuk San Pak family is Pak Ki-o(朴奇悟) who was a one of Samhan Gongsin(三韓功臣) in the reign of King Taejo. There is no record about Pak Sul(朴述) who was a son of Pak Ki-o in Koryôsa. But Pak Ch'ung-suk(朴忠淑) who was a grandson of Pak Ki-o passed by Ch'amji chôngsa( 知政事) and rose to Mnuha sirang p'yôngjangsa(門下侍郞平章事). After that there is no record about Pak On-yu who was a son of Pak Ch'ung-suk and Pak Hyông(朴衡) who was a son of Pak On-yu and Pak Yông-hu(朴永侯) who was a son of Pak Hyông in Koryôsa. The family prospered again in Pak Yông-hu's sons times. Pak Yông-hu had two sons. The first son's name is Pak Chông-yu(朴挺 ) and the other's name is Pak chung-hyôk(朴挺奕). Pak Chông-yu passed the government service examinations and rose to Ch'mirwôn pusa(樞密院副使). His son, Pak Yuk-hwa also rose to Chwa pokya(左僕射).

  In the branch of Pak Chông-yu, Pak In-sôk(朴仁碩) assumed the position of Hobu sangsô(戶部尙書), so he consolidated Chuk san Pak family position. And his son, Pak Sô(朴犀) performed a meritorious deed in the war with Mongol. But he lost his position by Mongl's pressure. His family had atrophied under the Mongol rule. After the reign of King Kongmin the branch of Pak Chông-yu prospered again because Pak Bo-ro(朴普老) succeeded his life and assumed the position of Munha P'yôngri(門下評理).

  But the branch of Pak chung-hyôk prospered under the Mongol rule. Pak Hwi(朴暉) who was a grandson of Pak chung-hyôk's grandson rose to Chônbup p'ansô(典法判書). Pak Chôn-ji(朴全之) was in King Ch'ungsôn's favor after passing the government service examinations, and he took the leading role in reformist politics. Since Pak Chôn-ji' success Chuk San Pak family had ranked with another aristocrat family. Pak Wôn(朴遠) who was a son of Pak Chôn-ji got married with Hong Chabôn's granddaughter, and he rose to Chôngdang munhak(政堂文學). After that most of scions of Chuk San Pak family succeeded in their lives and got married with scions of another aristocrat family.

  Chuk San Pak family did not vigorous activity in early Koryô Dynasty, but after the reign of King Injong they grew up as aristocrat family. Although they had some rise and fall, they had maintained their position. In order to maintain their position they acted in harmony with the Military rule(武臣政權), and the Mongol rule, and they got positively married with another aristocrat family.




 * 한경대 교양학부 교수

1) 李起男, 1971, 「忠宣王의 改革과 詞林院의 設置」 㰡”歷史學報㰡• 52.


2) 李樹健, 1984, 「高麗前期 支配勢力과 土姓」 㰡”韓國中世社會史硏究㰡•, 一潮閣.

   -----, 1984, 「高麗後期 支配勢勢力과 土姓」, 위의 책.


3) 金光哲, 1987, 㰡”高麗後期 世族層과 그 動向에 관한 硏究㰡•, 東亞大學校 博士學位論文; 1991, 㰡”高麗後期世族層硏究㰡•, 東亞大學校出版部, pp.64~65 참조.


4) 류창규, 1989, 「高麗 武人政權 時代의 문인 朴仁碩 - 고문 존중․계승과 관련하여 - 」 㰡”東亞硏究㰡• 17.


5) 㰡”고려사절요㰡• 권 2, 광종 15년 秋八月條.


6) 박수경만이 기록되어 있다. 㰡”新增東國輿地勝覽㰡• 권 41, 平山都護府 人物.


7) 㰡”新增東國輿地勝覽㰡• 권 8, 竹山縣 人物.


8) 李樹健, 위의 책, pp.156~157 참조.


9) 金龍善 編, 1993, 「21, 朴景仁 墓誌銘」 㰡”高麗墓誌銘集成㰡•, 한림대 아   시아문화연구소.


10) 위의 책, 86, 朴景山 墓誌銘.


11) 㰡”竹山朴氏重鐫族譜㰡•(국립중앙도서관 청구기호: 複古朝 58-29-154),    㰡”竹山朴氏忠顯公派譜㰡•(忠顯公派譜編纂委員會 編, 1979, 국립중앙도    서관 청구기호: 古-2518-25-51-1-3), 㰡”竹山朴氏派譜㰡•(朴仲植 編,     1955, 국립중앙도서관 청구기호: 古-2518-25-55-1-3), 㰡”竹山朴氏     忠質公派譜㰡•(竹山朴氏忠質公派南海譜所 編, 竹山朴氏忠質公派南海    譜所, 1985, 국립중앙도서관 청구기호: 999.11-박619충-1-2) 등을     주로 참고하였다.


12) 위의 책, 158 朴仁碩 墓誌銘과 223 朴全之 墓誌銘, 그리고 255 朴    遠墓誌銘.


13) “父永侯 嘗誡以忠孝之道 挺蕤亦以自勵”(㰡”고려사㰡• 권 98, 朴挺蕤傳).


14) 趙從耘(1607~1683) 편저, 1994, 保景文化社.


15) 족보에는 개국공신이고, 樞密院事를 지냈다고 되어 있지만, 믿을만    한 것은 되지 못한다.


16) 㰡”고려사㰡• 권 4, 顯宗 10년 10월


17) 㰡”고려사㰡• 권 6, 靖宗 3년 2월


18) 류창규, 1989, 「高麗 武人政權 時代의 문인 朴仁碩 - 고문 존중․    계승과 관련하여 - 」 㰡”東亞硏究㰡• 17 p.175. 참조.


19) 㰡”靑鶴集㰡•은 조선 宣祖에서 仁祖 년간 仙家였던 趙汝籍이 지은 책    이라고 한다. 위의 논문 주) 14 참조.


20) 㰡”고려사㰡• 권 16, 인종 10년 8월 己酉條.


21) 㰡”고려사㰡• 권 17, 인종 22년 12월 戊戌條.


22) 위의 책, 인종 23년 2월 丁亥條.


23) 이상 박정유에 대한 설명은, 㰡”고려사㰡•, 열전, 권 11, 朴挺蕤傳을 참    조.


24) 㰡”고려사㰡• 권 18, 의종 11년 11월 癸亥條. 이때 工部郞中 李光縉도    生辰을 축하하는 임무를 맡고 같이 갔다.


25) 위의 책, 의종 17년 甲寅條.


26) 위의 책, 열전, 권 9 尹瓘 附 尹鱗瞻傳과 㰡”고려사절요㰡• 권 11, 의종    16년 6월조 참조. 그들의 행동에 대하여, 어떤 사람이 “말하지 말    라는 것이 司諫이요, 말없는 것이 正言이요, 말더듬는 것이 諫議     다. 유유히 날을 보내고 무엇을 논하였던가”라고 말하면서 간관을    조롱하였다고 한다.


27) 위의 책, 열전, 12 文克謙傳과 㰡”고려사절요㰡• 권 11, 17년 8월조 참    조. 이런 박육화 등의 행동에 대하여, 당시 사람들이 송 나라 사람    들의 “함께 놀던 英俊들은 무슨 낯이 그리도 두터우냐”라는 싯귀    를 외면서 기롱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최유칭의 관직에 대하여 㰡”    고려사절요㰡•에는 左常侍라고 되어 있어서 문극겸전의 내용과 차이    를 보이고 있다.


28) 이하 박인석의 행적과 인척관계는 주로 金龍善 編, 㰡”高麗墓誌銘集    成㰡•, 158 朴仁碩 묘지명과 㰡”고려사㰡• 등을  참조하였다.


29) 평안남도 성천군.


30) 역시 족보를 참고하여 작성한 것이다. 박인석 묘지명에는 그가 죽   기 전에 박서를 제외한 다른 아들 6명은 모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족보에는 박서의 형으로 朴文成과 그의 아들 朴晎이 기재   되어 있다. 㰡”고려사㰡• 권 23, 세가 高宗 21년 정월 乙巳條에는 朴    文成이 右散騎常侍에 임명된 기록 있지만, 박인석이 강종 1년에     67세의 나이로 죽은 것을 생각한다면, 박인석의 아들이 아닌 것     으로 보인다. 또한 박홍은 㰡”고려사㰡• 권 26, 세가  元宗 11년 5월    乙卯條에 同知樞密院事로 나오는데, 박인석의 손자인지의 여부 역   시 확인 할 수 없다.


31) 黃秉晟, 1985, 「金甫當亂의 一性格」 㰡”韓國史硏究㰡• 49 참조.


32) 金龍善 編, 㰡”高麗墓誌銘集成㰡•, 103 崔允儀 묘지명 참조.


33) 㰡”고려사절요㰡• 권 11, 明宗 즉위년 9월


34) 위의 책, 권 12, 明宗 2년 正月


35) 류창규, 1989년 논문.


36) 류창규는 앞 논문에서 박인석 묘지명의 “遂抛棄官爵 遠竄于南荒     聞北原民俗頗淳 古宜於人 迺往卜居”라는 내용 때문에 박인석이 스    스로 낙향한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忽爲飛語所中 幾陷不測 朝有    惜公者 得移延昌郡安置”라는 바로 뒤의 내용을 볼 때 그가 원주에    유배당하였다가, 연창군으로 옮겨 안치된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김용선도 㰡”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㰡•(김용선,        2001,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p.479에서 박인석이 연창군으    로 귀양지를 옮긴 것으로 해석하였다.


37) 李佑成은 권불화를 權敦禮로 보았다. 李佑成, 1977, 「高麗 武臣執    權下의 文人知識層의 動向」 㰡”嶺南大學校 開校 30週年紀念 國際學    術會議發表會論文集㰡•, 嶺南大 ; 1982, 㰡”韓國의 歷史像㰡• p.189 참조.


38) 㰡”고려사㰡• 권 129, 崔忠獻傳.


39) 㰡”고려사㰡• 권 21, 신종 5년 閏 12월


40) 㰡”고려사㰡• 권 100, 丁彦眞傳.


41) 㰡”拙藁千百㰡• 권 1, 海東後耆老會序와 金龍善, 1987, 「高麗 墓誌銘 二    例」 㰡”斗溪李丙燾博士九旬紀念韓國史學論叢㰡•, 知識産業社 참조.


42) 김용선, 앞의 논문, p.369 참조.


43) 한편 박인석은 유능한 문신들에 대하여 능동적으로 교유하면서 자    신의 운신의 폭을 넓히려고 하였던 것 같다. 이에 대해서는 㰡”고려    사㰡• 권 102, 兪升旦傳 참조.


44) 이상 박서에 대한 설명은 㰡”고려사㰡• 권 103, 朴犀傳을 주로 참고하    여 서술하였다.


45) 熙宗 즉위년 5월에 박인석이 남은 金順 등을 사로잡고 이를 왕에    게 보고하였다. 따라서 박서가 내시에 임명된 것은 이 직후일 것    이다. 㰡”고려사절요㰡• 권 14, 희종 즉위년 5월.


46) 㰡”固城朴氏世譜㰡•(朴舜奎 編, 固城朴氏世譜所, 1919, 국립중앙도서관     청구기호: 한-古朝58-가29-24).


47) 㰡”陰城朴氏世譜㰡•(朴濟殷 編, 1939, 국립중앙도서관  청구기호: 한-古    朝58-가29-170).


48) 趙從耘(1607~1683) 편저, 1994, 保景文化社, p.168, p.171.


49) (竹山朴氏忠質公派南海譜所 編, 竹山朴氏忠質公派南海譜所, 1985,     국립중앙도서관 청구기호: 999.11-박619충-1-2).


50) 㰡”고려사㰡• 권 137, 우왕 14년 5월 丙戌條.


51) 위의 책, 권 133, 우왕 1년 8월


52) 위의 책, 권 134, 우왕 6년 2월. 이때 敬烈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53) 위의 책, 권 40, 공민왕 12년 11월


54) 위의 책, 권 137, 창왕 1년 9월 庚申條.


55) 위의 책, 권 40, 공민왕 11년 2월 乙巳條.


56) 金光哲, 주) 3 논문.


57) 㰡”氏族源流㰡•, p.185.


58) 金龍善 編, 1993, 「201, 金方慶 墓誌銘」 㰡”高麗墓誌銘集成㰡•,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59) 㰡”고려사㰡• 권 104, 金方慶傳.


60) 朴全之의 아버지인 박휘는 㰡”고려사㰡•에는 朴暉로, 박전지의 묘지명    에는 朴煇로 나온다.


61) 㰡”氏族源流㰡•와 주)11의 족보들을 이용하여 작성하였고, 㰡”고려사㰡• 등    에서 확인이 되지 않는 인물들도 일단 기록은 하였다.


62) 이하 충선왕대의 ‘개혁정치’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을 주로 참고    하였다. 李起男, 1971, 「忠宣王의 改革과 詞林院의 設置」 㰡”歷史學    報㰡• 52.


63) 金龍善, 앞의 책, 「223, 朴全之 墓誌銘」. 이하 박전지에 대한 서술    은 그의 묘지명을 중심으로 하고, 㰡”고려사㰡• 등을 참고하여 서술하였    다.


64) 李起男은 주) 1논문에서 박전지를 신진세력으로 파악하였는데, 이    는 그의 가문적 배경을 지나치게 축소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65) 㰡”國朝文科榜目㰡•, 太學社, 1984 참조.


66) 㰡”고려사㰡• 권 73, 選擧 科目 選場, 忠肅王 4년, 문생들의 이름은 㰡”     國朝文科榜目㰡•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67) 㰡”고려사㰡• 권 35, 세가, 忠肅王 8년 10월 庚戌條에는 박전지가 이때    許有全․尹珤 등과 함께 치사한 것으로 되어 있고, 㰡”고려사절요㰡•    권 24, 충숙왕 11년 2월 기사에는 그때 僉議政丞을 제수하고 치사    하게 하고, 推誠贊化功臣의 칭호도 같이 하사한 것으로 되어 있는    반면, 묘지명에는 泰定 乙丑年 곧, 충숙왕 12년에 치사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아마도 포상할 일이 있을 때마다 관직을 올려주면    서 다시 치사를 시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68) 㰡”고려사㰡• 朴全之傳과 㰡”고려사절요㰡• 권 24, 충숙왕 12년 7월 기사.


69) 㰡”고려사절요㰡• 권 24, 忠肅王 11년 2월


70) 㰡”고려사㰡• 권 30, 세가, 忠烈王 13년 11월 壬子條.


71) 金龍善, 1988, 「新資料 高麗 墓誌銘 十七點」 㰡”歷史學報㰡• 117 참조.


72) 㰡”고려사㰡• 권 105, 鄭可臣傳.


73) 㰡”고려사㰡• 권 106, 李湊傳 附 李行儉.


74) 박전지의 묘지명에서는 이름이 瑗으로 나오기 때문에 그 뒤에 고    친 것으로 보인다.


75) 㰡”고려사㰡• 朴全之傳과, 朴龍雲, 1990, 㰡”高麗時代 蔭敍制와 科擧制硏    究㰡•, 一志社, p.465 참조.


76) 㰡”고려사㰡• 권 73, 選擧 科目 選場, 忠肅王 13년, 문생들의 이름은 㰡”    國朝文科榜目㰡•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77) 㰡”고려사절요㰡• 권 24, 충숙왕 11년 2월


78) 㰡”고려사㰡• 권 35, 충숙왕 14년 11월 戊子條에서 瀋王派의 책동을 저    지한 공으로 2등공신에 책록된 것을 확인할 수 있고, 金龍善 編, 「    255, 朴遠 墓誌銘」에서는 ‘推忠翊戴’라는 공신 칭호를 알 수 있다.


79) 이상의 설명은, 박원 묘지명과 㰡”고려사㰡• 朴全之傳 등을 주로 참조    하였다.


80) <그림 4>에서 보이는 것처럼 족보 등에서는 박원에게 6남 3녀가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홍씨 부인은 5남 2녀를 낳았으므로    나머지가 유씨 부인의 소생일 것이다.


81) 㰡”氏族源流㰡•와 주)11의 족보들을 이용하여 작성하였고, 㰡”고려사㰡• 등    에서 확인이 되지 않는 인물들도 일단 기록은 하였다.


82) 金龍善 편, 「239, 朴遠 妻 洪氏 墓誌銘」 㰡”高麗墓誌銘集成㰡•.


83) 㰡”고려사㰡• 권 132, 辛旽傳.


84) 㰡”고려사㰡• 권 131, 金鏞傳.


85) 㰡”고려사㰡• 권 134, 禑王 6년 正月 癸巳朔條.


86) 㰡”고려사㰡• 권 137, 禑王 14년 4월 丁未條.


87) 㰡”고려사㰡• 권 45, 恭讓王 2년 4월 壬寅條.


88) 㰡”世宗實錄㰡• 권 11, 3년 1월 丙子條.


89) 㰡”고려사㰡• 권 38, 공민왕 3년 7월 丙戌條.


90) 위의 책, 6월 丙午條.


91) 위의 책, 7월 癸酉條.


92) 㰡”太祖實錄㰡•, 권 13, 7년 1월 壬戌條.


93) 위의 졸기에서도 확인된다.


94) 㰡”고려사㰡• 권 126, 李仁任傳.


95) 㰡”고려사㰡• 권 73, 選擧 科目 選場 禑王 6년 5월


96) 㰡”고려사㰡• 권 126, 林堅味傳.


97) 㰡”太祖實錄㰡•, 권 13, 7년 1월 壬戌條.


98) 㰡”氏族源流㰡• p.679.


99)  㰡”고려사㰡• 권 38, 공민왕 2년 2월 乙卯條.


100) 위의 책, 4월 己酉條, 6월 丁酉條, 11월 壬午條.


101) 㰡”고려사㰡• 권 41, 공민왕 14년 6월 庚寅條.


102) 㰡”고려사㰡• 권 43, 공민왕 21년 2월 丙戌條.


103) 㰡”고려사㰡• 권 135, 우왕 10년 甲午條.


104) 㰡”고려사㰡• 권 73, 選擧 科目 選場 昌王 元年 9월


105) 㰡”고려사㰡• 권 46, 恭讓王 4년 4월 癸丑條.


106) 족보류와 㰡”氏族源流㰡•에서 이름이 서로 다르게 나온다.


107) 㰡”고려사㰡• 권 91, 宗室 神宗


108) 㰡”고려사㰡• 권 37, 忠穆王 卽位年 6월 乙卯條.


109) 㰡”氏族源流㰡• 439쪽, 海平 尹氏 항목에서는 윤진의 두 번째 부인이    朴遠의 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110) 㰡”고려사㰡• 권 73, 選擧 科目 選場 禑王 8년 5월


111) 㰡”고려사㰡• 권 136, 우왕 12년 8월 丙午條.


112) 㰡”고려사㰡• 권 137, 우왕 14년 正月 庚寅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