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적표 건양 2년

 하나. 조선시대 고종임금. 건양2년(1897년). 2005년 기준으로 108년 된 호적표(현재의 호적등본)


 건양 []

 

조선 고종 때에 제정된 연호(年號).

한 나라가 자주독립국임을 표시하기 위해서는 보통 건원칭제()를 하는데, 조선시대에는 처음부터 연호를 제정하지 않고 있다가, 1895년(고종 32) 8월에 다시 집권한 김홍집내각()에 의하여 연호가 제정되었다. 음력 1895년 11월 17일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1896년 1월 1일부터 건양이라는 연호를 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고종 때의 건원칭제는 조정에서 결정한 것이 아니고 일본의 강요로 취한 조치였으며, 1897년에 광무()로 바뀌었다. 네이버 백과사전.

 둘. 조선시대 고종임금. 광무2년(1898년). 2005년 기준으로 107년 된 호적표(현재의 호적등본)

 
 광무 []

1897년(고종 34) 제정된 대한제국의 두번째 연호.

1895년 을미사변 이후 개화당 내각은 갑오개혁 때의 내정개혁안()을 추진시켜 1895년 11월부터 양력을 사용하기로 하여, 음력으로 1895년 11월 17일을 양력 1896년 1월 1일로 정하고, 첫 연호로 건양()을 사용하도록 결정하였다.

이 첫 연호의 사용으로 중국과의 종속관계를 탈피하고 새로이 자주적인 국가로 나아갔다고 볼 수 있으나, 실제적으로는 일본 제국주의의 대륙침략을 위한 한 표현에 불과하였다. 일본인에 의한 명성황후()의 시해()와 강제적인 단발()의 시행은 배일감정을 격화시켜 1896년 1월부터 4월까지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국내는 크게 혼란하였다.

이에 친러파 이범진() 등이 K.웨베르와 밀의하여 명성황후의 피살 이후 그 신변마저 불안하던 국왕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고 새로운 친러정권을 수립하게 되었다. 고종의 아관파천() 이후 각종 이권이 러시아로 넘어가자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사회여론은 국왕의 환궁을 요청하게 되었고, 1897년 2월 20일 드디어 국왕은 환궁하였다.

독립협회의 여론 환기에 따라 국민의 국가의식이 앙양되는 가운데, 국왕에 대한 황제의 칭호 사용과 새로운 연호의 제정을 기하고 국호를 개정함으로써 국운()의 신기원()을 마련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의정부 의정대신() 심순택()의 주청()으로 1897년 8월 14일 광무라는 연호를 실시하도록 하여 8월 17일부터 사용하였다.

이로써 첫번째 연호인 건양을 사용한 지 1년 7개월 만에 두번째 연호인 광무로 고쳐 순종()이 등극할 때까지 10년간 사용하였으며, 광무 원년은 조선 개국기원 506년이 되었다. 네이버 백과사전.

 셋. 조선시대 고종임금. 광무4년(1900년). 2005년 기준으로 105년 된 호적표(현재의 호적등본)


 고종 [高宗, 1852~1919.1.21]

조선 제26대 왕(재위 1863∼1907).
 
영조의 현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이다. 비()는 명성황후로, 여성부원군() 치록(祿)의 딸이다. 1863년(철종 14) 12월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조대비()의 전교()로 12세에 즉위하였다. 새 왕의 나이가 어리므로 예에 따라 조대비가 수렴청정하였으나, 대정()을 협찬하게 한다는 명분으로 정권은 대원군에게 넘어가 이로부터 대원군의 10년 집정시대가 열렸다.

척신() 세도정치의 배제, 붕당문벌()의 폐해 타파, 당파를 초월한 인재의 등용, 양반으로부터의 신포징수(), 양반 유생의 발호 엄단 등은 고종 초기 10년 동안 대원군이 이룩한 치적이다. 그러나 경복궁 중수()에 따른 국가재정의 파탄, 악화()인 당백전()의 주조()와 민생의 피폐, 과중한 노역()으로 인한 민심의 이반과 소요, 가톨릭교 탄압에 따른 8,000여 명의 교도 학살, 쇄국정책,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 어두운 정치적 자취를 남기고 1873년(고종 10) 11월, 명성황후의 공작에 따라 대원군이 섭정에서 물러나자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게 되었다.~~~~중략~~~~~

1885년에는 조선에서 청나라의 우월권을 배제하고, 일본도 동등한 세력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청·일 간의 톈진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이 한반도에 발판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이 청·일 전쟁을 유발하고, 일본이 승리하자 친일파는 대원군을 영입, 김홍집() 등의 개화파가 혁신내각을 조직하여 개국 이래의 제도를 바꾸는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로부터 한국 지배기반을 굳힌 일본은 본격적으로 내정을 간섭하여 한국 최초의 헌법이라고도 할 〈홍범 14조()〉가 선포되고 청나라의 종주권을 부인하고 독립국으로 행세하는 듯하였으나, 일본의 내정간섭은 더욱 심하여져 관제를 일본에 준하여 개혁하고, 8도를 13도로 개편하였다. ~~~~~~ 중략 ~~~~~

고종은 1897년 2월 25일 러시아와 일본의 협상에 따라 경운궁(: 후의 덕수궁)으로 환궁, 8월에는 연호를 광무()라 고치고, 10월에는 국호를 대한, 왕을 황제라 하여 고종은 황제즉위식을 가졌다. 1904년(광무 8)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요구로 고문정치()를 위한 제1차 한 ·일 협약을 체결, 이듬해 한성의 경찰치안권을 일본헌병대가 장악하였으며, 이해 11월에는 제2차 한·일 협약인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김으로써 병자호란 이래 국가존망의 위기를 맞았다.
 이에 우국지사 민영환(조병세(홍만식() 등은 자결로써 항의하였지만 일본은 1906년 2월 통감부()를 설치하여 본격적인 대행정치() 체체를 갖추었다. 1907년 제2회 만국평화회의네덜란드헤이그에서 열리자 고종은 밀사 이준() 등을 파견하여 국권회복을 기도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 오히려 이 밀사사건 때문에 일본의 협박으로 황태자(순종)에게 양위()한 후 퇴위, 순종황제로부터 태황제()의 칭호를 받고 덕수궁에서 만년을 보내다가 1919년 1월 21일 일본인에게 독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고종의 재위 44년은 민족의 격동기로서 실질적으로 국운()과 명운을 함께 하여, 양위 3년 후에는 나라를 빼앗기는 비운을 맞았다. 네이버 백과사전

 끝.

 죽성대군(竹成大君) = 죽산대군(竹山大君) 교훈(敎訓)

         명철(明哲). 청백(淸白). 강인(强靭). 능동(能動). 웅비(雄飛)                     죽산박씨   juksan.com